김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전선 후방에서의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

진영읍 합동위령제 유족들

1960년 6월 진영읍 합동위령제에 모인 유족들.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한국의 쉰들러’ 김해 한림면장 최대성

 최대성(1906년생)은 해방된 그해 10월부터 전쟁 이후까지 죽 한림면(당시 이북면) 면장을 지냈다. 전쟁이 난 뒤로 김해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모조리 끌려가 갇혀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어느 골짜기나 논바닥에서 살해되었다. 용케 몸을 피한 사람들도 끝까지 추적당해 살해당했다. 한림면도 예외가 아니어서 보도연맹원들은 한림면 금융조합 창고에 구금되었다. 이들 역시 대한청년단 단원들과 한림지서(당시 이북지서) 경찰들에게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

최대성 면장은 주민들이 아무 죄 없이 죽는 걸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까막눈이오. 전쟁이 나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 곡식을 준다고 속여서 가입시킨 것입니다. 억울한 양민이 많소.”
면장이 이들의 살해를 반대하고 나섰지만 경찰들은 쉽게 동의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최대성은 당시 한림면 대한청년단장을 하고 있던 동생을 통해 경찰들에게 이들을 살려주자고 설득했다. 그는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 중 젊은이들은 모두 대한청년단에 가입시켜 빼주고, 나이 든 사람들은 창고 뒷구멍으로 도망치게 해 주었다. 그래서 다행히 금융조합 창고에 갇혀 있던 한림면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 한림면 주민 중 4명이 희생됐는데 그들은 경찰이 아닌 CIC에 직접 연행돼 살해된 사람들이었다.
김해 한림면 의인 최대성

김해 한림면 의인 최대성(1903~1978). @한림면최대성면장추모사업회

김해 국민보도연맹원
993명 이상 추정

 김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12일 결성되었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은 얼마나 되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김해지역 보도연맹원 등의 명단이 들어 있는 《부역자명부》를 입수했다. 이 문서에는 김해지역 2개 읍(김해읍·진영읍)과 11개 면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과 비맹원의 명부가 들어 있었다.

《부역자명부》를 분석해본 결과, 김해군 전체 읍·면지역 보도연맹원 중 예비검속된 수는 총 993명으로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진영읍이 152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장유면 125명, 김해읍 121명, 한림면 90명, 가락면 79명, 진례면 78명, 주촌면·녹산면 65명, 대저면 57명 순이었다. 읍·면별로 보도연맹원 수가 크게 차이나는 이유는 해방 직후 좌익활동의 강도와 좌익명망가의 존재 여부, 지리적 조건 등이 읍·면마다 달라 보도연맹원 규모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부역자명부》에 기록된 993명은 전쟁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의 인원 수일 뿐 김해군연맹의 전체 보도연맹원 수가 아니다. 여기에는 예비검속되지 않은 보도연맹원들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김해군의 전체 보도연맹원 수는 993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부역자명부 표지

《부역자명부》 표지.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배급 주고 땅 준다길래 도장 찍었는데

 김해지역 보도연맹원들의 과거 소속단체를 보면 남로당, 민청(민애청), 농민조합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이 단체에 가입했다고 해서 좌익 사상을 가졌거나 적극적 활동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〇용(1921년생, 김해읍 동상동 거주)은 김해지역 사람들이 남로당에 어떻게 가입하게 됐는지 증언했다.

정〇용은 해방 직후 강연이 있다고 해 김해읍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에 갔다. 그곳에는 김해의 유명한 좌익 간부들이 모여 있었다. 연설을 들어보니 “농민들에게 논을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내용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주최자들이 백지를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거기다 이름 쓰고 도장 찍고 가라. 그래야 나중에 특별배급 나오면 나눠주고 논도 분배해준다. 안 쓰는 사람은 배급도 못 타고 논도 못 받는다”고 했다. 백지를 받아보니 ‘남로당 가입 원서’였다. 그렇게 그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도장을 찍어 남로당원이 되었다. 그 후 김해지역에서 보도연맹이 창설되자 이들은 일괄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됐다고 한다.

도○○(김해읍 흥동 보도연맹원)은 해방 직후 농민조합에 가입하면 땅을 고르게 나눠준다고 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보도연맹이 창립될 당시 과거 농민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해 자신이 직접 김해경찰서에 가서 보도연맹에 들어갔다. 또 해방 직후 좌익 집회에 참석했다가 논과 특별배급을 나눠준다고 해 남로당 가입 원서에 도장을 찍은 사람들도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해방 직후 김해군에는 백의소년단과 백의청년단이라는 좌익 단체가 결성됐다. 여기에 가입했던 사람들도 보도연맹 가입 대상이 되었다. 참고인 김○○의 진술에 따르면 해방 직후 김해읍은 좌익세력이 압도적이어서 김해읍에 거주하는 소년들과 청년 중 다수가 백의소년단과 백의청년단에 가입했다. 그 후 김해읍에서 보도연맹이 조직될 당시 연맹 조직책들은 백의청년단 단원 명부를 가지고 다니면서 명부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가입시켰다.

또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양식도 배급하고 매일 경찰서로 나가 교육도 받는 등 특별 대우를 해 준다고 해서 도장을 찍기도 했고, 좌익활동을 하는 친척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 좌익활동가를 따랐던 사람들, 보도연맹이 어떤 단체인지도 모르고 도장을 찍어준 사람들, 보도연맹과 대한청년단에 동시에 가입한 경우,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머슴, 노름꾼까지 보도연맹의 실체와는 관련 없는 온갖 인물들이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때는 아무도 그 명부가 곧 살생부가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용공혁신분자조사서

《용공혁신분자조사서》(김해경찰서 정보과, 1972) 표지(위), 내용 일부(아래). 오른쪽 끝 비고(붉은 사각형)에 기재된 것이 살해된 시기이다. 명부의 제목은 《용공혁신분자조사서》라고 돼 있지만 수록된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과 그 가족에 대한 인적사항이다. 따라서 이 자료의 실제 내용은 ‘처형자명부’라고 볼 수 있다.

김해읍 보도연맹원들은 희생 직전 어디에 갇혀 있었나

 김해읍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은 7월 12일, 8월 4일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김해경찰서로 출두하거나 연행되었다. 소집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검거 대상에 올랐다. 소집된 사람들은 김해경찰서 유치장과 무도장, 김해읍사무소 창고, 김해전매소 창고 등지에 구금되었다. 김해지역 보도연맹원들은 7월 15~16일, 8월 1~2일에 가장 많이 구금된 장소에서 이동해 살해되었다. 김해 진영읍에 구금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은 6월 28일부터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다가 7월 15일과 8월 2일에는 수십 명씩 사라졌다.

왜 7월 15일부터 살해가 급증했을까? 7월 14일 경남경찰국은 각 관하 경찰서에 《불순분자 일제검거의 건》이라는 통첩을 내려 이미 준비돼 있던 ‘불순분자 명단’에 따라 이들을 일제히 검거하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7월 15일 경남도경찰국은 각 관하 경찰서에 《불순분자 처리의 건》을 하달했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살해 시기는 당시 전황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7월 15~16일은 인민군이 유엔군의 금강방어선을 총공격해 함락시킨 날이며, 8월 1~2일은 인민군이 모든 전선에서 낙동강방어선에 육박한 날이다. 결국 구금자들이 가장 많이 사라진 날, 즉 집단살해된 날은 전황이 극도로 불리한 때였다.

김해경찰서 유치장과 무도장에는 김해경찰서에서 예비검속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을 주로 구금했다. 유치장은 모두 3곳이었다. 이 중 2곳에는 남자가, 1곳에는 여자가 구금돼 있었다고 한다. 유치장 크기는 약 3∼4평 정도로 아주 작았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을 수용해 사람들이 틈도 없이 빽빽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참고인 정〇용은 김해경찰서 인근에서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전쟁 후 어느 날 GMC 트럭 6∼8대가 김해경찰서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조금 있다가 경찰서에서 다시 트럭이 나왔는데 트럭 적재함 네 귀퉁이에 총을 든 사람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사람들이 트럭 적재함에 가득 차 있었다. 당시 그의 철공소는 김해경찰서에서 차가 나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는 김해경찰서에서 나온 트럭 3∼4대가 생림면 방면으로 가고, 다른 트럭 3∼4대는 대동면 방면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다.

김해읍사무소 창고에는 경찰과 CIC에서 예비검속한 사람들이 모두 구금되었다. 창고에는 사람이 지나갈 틈도 없을 정도로 예비검속자들이 촘촘히 구금돼 있었다. 창고는 두 개였으며, 조명이 전혀 없어서 수용된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구금된 사람들에게는 주먹밥이 배급됐다. 사람들이 너무 촘촘히 앉아 있어 들어갈 수 없어서 창고 입구에서 주먹밥을 던져주었다. 이 때문에 구금된 사람들끼리 싸움이 나고 밥을 굶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참고인 김○○은 김해읍 대한청년단 단원으로 CIC 사무실 앞에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트럭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전쟁 당시 대한청년단 사무실은 CIC 김해파견대 사무실에서 40m 떨어진 대각선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참고인이 대한청년단 사무실 유리창에서 본 사실에 따르면 트럭은 주로 밤에 나갔다고 한다. CIC 보조원들이 먼저 도로를 막고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경계를 선 후 트럭이 나갔다. 하루에 2대 정도 나갔는데 한 대에는 국방색 포장을 씌웠고, 다른 한 대에는 흰색 포장을 씌웠다. 트럭 적재함에는 한 대당 약 20∼30명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머리도 못 들게 했다고 한다. 트럭 적재함에는 CIC 대원들이 칼빈소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앞에 두 명, 뒤에 두 명이 앉아서 총을 가운데로 겨누고 있었다. 나갔다가 돌아올 때 보면 흰색 포장을 씌운 트럭에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고, 국방색 포장을 씌운 트럭에는 사람들을 남겨서 싣고 왔다. CIC는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다시 김해읍사무소 창고에 수용했다. 가두기 전에 한 사람씩 불러서 아직 검거되지 않은 좌익 관련 인물들을 자백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이름이 거명된 사람들은 즉시 CIC 대원들이 검거에 나섰다. 이처럼 CIC는 사람들을 죽일 것처럼 희생 현장까지 이송했다가 다시 데려온 후 관련자를 자백하게 하는 고도의 심리적 수법을 사용했다.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총으로 살해

 김해읍에 구금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은 1950년 6월 29일부터 9월 18일까지 김해경찰서 경찰과 CIC에 의해 트럭에 실려 생림면 나밭고개와 상동고개, 대동면 주동리 주동광산과 숯굴, 한림면 안하리 가자골에서 희생되었다.

참고인 김○○은 구금 장소인 김해읍사무소 창고를 경비하던 중 상동고개 희생 과정에 대한 진술을 들었다. 사각형으로 판 구덩이에 사람들을 산 채로 집어넣고 그대로 총을 쏘아 죽인 후 소나무 가지를 가져다 얹은 다음 흙을 덮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 참고인이 상동고개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희생 현장을 직접 봤다. 현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온통 고무신이 널려 있었고, 현장은 매장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소나무 가지를 얹고 흙을 약간 덮어 놓은 상태로 있었다고 했다.

참고인 김〇진은 대동면 주동리 숯굴 인근에 거주하던 중 주동광산과 숯굴의 희생 현장을 목격했다. 1950년 7월 하순경 어느 날 오전 10시쯤 갑자기 주동광산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집에서 내려다보니 자신의 집 800m 아래에 위치한 광산 입구에 총을 든 사람들이 일렬로 정렬해 사격을 했다고 한다. 총을 쏜 사람들은 모두 8∼9명이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흰옷을 입었으며 일본 99식 소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김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 현장

김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 현장.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생림면 나밭고개와 상동고개

생림면 나밭고개와 상동고개.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대동면 나밭고개와 숯굴

대동면 나밭고개와 숯굴.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진영읍 보도연맹원들은 어디에 갇혔다가 살해되었나

 진영읍 보도연맹원들 역시 7월 12일, 8월 4일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지서로 출두하거나 연행되었다. 경찰들은 마을 이장을 통해 훈련이 있다거나 교육이 있다고 속여 보도연맹원들이 의심 없이 소집에 응하도록 했다. 이들은 진영지서 유치장과 진영금융조합 창고, 한얼중학교에 분산 수용되었다. 구금된 사람들은 진영지서에서 좌익활동 경력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구금 초기에는 가족의 면회가 허용되었다. 가족들이 밥을 가지고 가면 창고 밖에서 보초가 안으로 넣어주었고, 구금자들이 다 먹고 나면 빈 그릇을 가지고 나와 전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경찰들은 가족들에게 돗자리와 베개를 가져오라고 한 후 다음부터는 자신들이 주먹밥을 배급한다며 면회를 금지했다. 그 후 가족들은 하루종일 창고 주변에서 기다리다 겨우 몇 시간에 한 번씩 구금자들을 화장실로 데려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구금된 사람들은 손목이 묶인 채로 고개를 숙이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가족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면 몽둥이로 사정없이 맞곤 했다.
진영금융조합 창고

진영금융조합 창고.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진영읍에 구금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은 1950년 6월 28일부터 8월 17일까지 김해경찰서 경찰과 CIC, 해군G-2, 진영읍 비상시국대책위원회에 의해 트럭에 실려 생림면 나밭고개와 진례면 냉정고개, 한림면 안하리 가자골, 창원군 동면 덕산고개, 창원군 대산면 수산교 인근 낙동강변, 진영읍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진영읍에 구금된 사람들의 희생 과정에는 진영읍 비상시국대책위원회가 깊이 관여했음이 확인되었다. 1950년 7월 중순경 진영읍 유력자들이 모여 진영읍사무소 2층에서 비상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진영읍, 한림면, 진례면, 창원군 대산면에서 남녀 300여 명을 연행해 진영금융조합 창고에 수용했다. 이들 중에서 뇌물을 바친 사람은 석방하고, 남은 사람들을 생림면 나밭고개와 창원군 덕산고개 등 수십 군데로 데려가 살해했다.

한림면 안하리 자원부락에 거주하던 참고인 지〇순은 가자골 희생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가자골 개울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있었는데 해 질 무렵 골짜기 아래 신작로에 화물차 2대가 정차했다. 이윽고 화물차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차했는데 손이 줄로 묶인 채 앞뒤로 엮여 있었다. 내린 사람들은 2열 종대로 골짜기로 끌려 올라갔다. 참고인이 개울에 숨어서 보니 골짜기에 이미 10m 넘는 구덩이가 길게 파여 있었고, 손이 묶인 사람들이 구덩이에 도착한 직후 총소리가 들렸다.

전시 후방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

 김해지역은 전쟁 당시 한 번도 인민군에게 점령되지 않았고, 임시수도 부산과 경계에 위치한 최후방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보도연맹원 등 1,220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예비검속됐고, 이 중 약 75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김해지역 희생자들은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발생한 보도연맹 사건처럼 후퇴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살해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어 살해했다고 하지만 비점령지역인 김해지역에서도 다수의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살해한 것을 볼 때 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에 대한 살해는 인민군 위협 여부와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진행됐다. 이는 국가의 조직적인 명령 없이는 불가능했다.

사건 직후 유족들은 대부분 경찰이 두렵고, 사망 장소를 몰라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희생 현장을 발굴한 것은 1960년 4·19혁명이 난 뒤였다. 희생자의 시신은 이미 유골만 남은 상태였다. 유족들은 희생 현장에 남아 있던 희생자들의 옷과 허리띠, 신고 간 신발, 교정한 치아 등을 보고 유골을 확인했다. 일부 유족은 1960년 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단에 출석해 증언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김해읍과 진영읍에 각각 합동묘를 만들었다. 김해읍에서는 김해읍 남산(현 김해시청 자리)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진영읍에서는 유골 중 두개골은 유골함에 넣고, 나머지는 진영화장장에서 화장했다. 유족들은 한 집당 보리쌀 2말씩을 걷고 각계에서 온 성금을 합해 350∼500평의 부지를 직접 구입해 진영읍 설창리 산36-1번지에 합동묘를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다. 합동묘는 일반 묘소의 5배가 넘을 만큼 크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이후 유족회 간부들이 구속되고 합동묘마저 파괴되고 말았다.
사건명 김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김해 국민보도연맹 사건〉 (1기)
관련 조사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김해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1)> (2기)
지역 경남 김해시
사건 발생일 1950년 6월 28일부터 9월 18일까지
진실규명 신청인 안○진 외 72명
진실규명 결정일 2009년 1월 5일
진실규명 대상자 희생자 수 750여 명 이상 추정
(신원 확인: 남〇우 등 76명(신청), 강〇중 등 196명(미신청) 총 272명)
가해주체 경남지구CIC 김해파견대, 김해경찰서, 해군 진해통제부 정보참모실 진영파견대, 공군 항공사령부 김해(항공)기지부대 G-2, 진영읍 비상시국대책위원회, 우익청년단체
결정사안 1950년 6월 28일부터 9월 18일까지 김해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들이 육군본부 정보국 경남지구CIC 김해파견대, 김해경찰서, 해군 진해통제부 정보참모실 진영파견대, 우익청년단체, 진영읍 비상시국대책위원회에 의해 집단살해된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한 사례
참고자료 KTV 영상기록 진실 그리고 화해 시즌4 〈참혹한 학살의 기억–김해 민간인 희생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