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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
본문
순천지역 여순 사건
- 조사국조사2국
- 사건유형민간집단희생
- 결정유형진실규명결정
- 작성일2009.03.02
- 조회수681
1. 강재수(姜裁秀, 직다-324) 외 438명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시내, 승주읍, 서면, 월등면, 황전면, 상사면, 해룡면, 주암면, 외서면, 낙안면, 별량면 등 순천시 일대에서 국군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연대(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사살되었다.
2. 국군 제2연대(1ㆍ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순천시내 민간인을 연행, 북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 건물 뒤편에서 집단사살했다.
3. 국군 제3연대(1ㆍ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진압작전 이후 1949년 초까지 순천농림중학교와 순천 철도국에 주둔하면서 순천거주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하거나,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역, 낙안면 등지에서 위법적으로 사살했다.
4. 국군 제4(20)연대(1ㆍ2대대)는 순천진압작전과 1949년 토벌작전 과정에서 순천시 남국민학교와 풍덕동 옛 펄프공장, 황전ㆍ월등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별량면ㆍ순천시내ㆍ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4연대는 민간인들을 주둔지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사살했다.
5. 국군 제12연대(1ㆍ2ㆍ3대대)는 1948년 10월 하순, 1949년 1월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구례읍 등에 주둔하면서, 순천시내ㆍ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제12연대는 주둔지와 북국민학교ㆍ황전지서 등지로 민간인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인근 순천농림중학교ㆍ양지맷골 등지에서 사살하였다. 또한 이들은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한 후, 마을 인근에서 민간인을 사살했다. 특히 12연대 지휘관들은 소심한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지시하거나, 난폭한 부하에게 목을 베라고 한 뒤 총에 걸고 다니게 하는 등의 가해행위를 했다.
6. 국군 제15연대(1ㆍ2대대)는 순천 탈환 이후부터 1949년에 걸쳐 순천남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주암면ㆍ황전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 전 지역을 대상으로 마을을 수색하고 주민을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가옥을 소각한 뒤, 민간인들을 연행하여 불법적으로 집단사살했다. 특히 15연대는 친인척들에게 반군협조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척살하도록 교사하거나, 민간인을 살상하여 전과를 허위보고하는 등의 가해행위를 했다.
7. 한편, 순천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말까지 사찰계를 중심으로 관내 반군토벌 및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본서나 읍면별 지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해당 관내에서 불법적으로 사살했다.
8. 조사결과 강재수(姜裁秀, 직다-324ㆍ1378) 등 모두 439명의 희생자 신원이 확인되었다. 1948년 10월 말에서 1950년 2월까지 순천지역 여순사건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수는 약 2,000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정확한 피해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위원회에 신청된 자와 기록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439명이며 희생추정자는 5명이다.
9.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439명 가운데 20대와 30대가 319명으로 73%를 차지하였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1.4%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면별 분포에서는 순천시내권과 10개 읍면 가운데 서면과 상사면, 순천시내권에서 44.6%에 해당하는 2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서면지역의 피해가 많았다. 이는 서면이 백운산과 인접해 있고, 광양과 구례로 가는 길목인 까닭에 반군의 이동통로로 이용되었던 지리적인 요인과 더불어 국군 15연대에 의해 발생한 판교리 노은마을 사건ㆍ용계산 사건의 희생자가 많았던 점에 기인한다. 서면에서는 반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이 많았고, 이에 서면 사람들이 군경과 반군의 중간에 놓이게 되면서 다른 면에 비해 희생자가 많았다고 판단된다.
10. 군경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희생자들이 반란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남로당원’, ‘지방폭도’, ‘빨갱이’였다고 주장하며, 가해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반군 활동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반군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이유는 대체로 이를 반영하듯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반군협조혐의로서 숙식이나 식량제공ㆍ노무동원ㆍ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 은닉 등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에는 반군이 활동한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도 포함된다.
둘째는 반군에 가담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가담혐의로 지목되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담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代殺)로, 바로 좌익 및 입산자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밖에도 연행이유와 피해이유를 모르거나 무고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자의적이며 무리하게 연행 및 취조하고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 본 사건의 가해주체는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연대(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천경찰서 경찰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제2여단장(원용덕 대령)→제2연대장 이○○→제1대대장 박○○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제5여단장(김백일 중령)→제3연대장 함○○→제1대대장 박○○ㆍ제2대대장 조○○ㆍ제3대대장 한○○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4(20)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남지구전투사령관(김백일 중령)→제4연대장 이○○ㆍ위○○ㆍ박○○→제1대대장 유○○ㆍ제2대대장 이○○ㆍ제3대대장 오○○으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육군 준장 송호성)→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남지구전투사령관(제5여단장 김백일)→제12연대장 백○○ㆍ백○○ㆍ송○○→제1대대장 허○ㆍ제2대대장 김○○ㆍ제3대대장 이○○ㆍ연○○로 확인되었다. 1949년 3월 1일 이후에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정일권)가 구례지역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육군준장 송호성)→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남ㆍ북지구전투사령관(제5여단장 김백일ㆍ제2여단장 원용덕)→광주5사단(사단장 원용덕)→제15연대장 신○○ㆍ김○○ㆍ윤○○ㆍ송○○→제1대대장 이○○ㆍ양○○ㆍ김○○ㆍ제2대대장 최○○ㆍ제3대대장 최○○으로 확인되었다.
본 사건은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인 감독 책임은 국방부,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순천지역 경찰의 경우는 이중의 지휘ㆍ명령계통 하에서 활동했다. 하나는 순천지역 계엄사령관→순천경찰서장, 다른 하나는 제8관구경찰청(전남경찰국)→순천경찰서장으로 하달되는 계통이었다. 본 사건 당시 순천경찰서장은 변○○ㆍ양○○ㆍ손○○ㆍ이○○이었다. 그리고 당시 제8관구경찰청장(전남경찰국장)은 김○○ㆍ김○○이었다. 경찰 최상급 기관인 내무부 치안국이 본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 명령을 내렸거나 보고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휘 및 관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12. 본 사건 과정에서 군경당국은 본 사건 관련자를 체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 불법적인 취조와 고문, 자의적인 심사와 분류에 따른 살해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본 사건에서 군경이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근거는 계엄령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은 계엄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공포되었고, 비록 계엄사령관에게 행정권과 사법권은 주어졌으나,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은 없었다. 본 사건 당시 현지 사령관은 계엄령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아래, 민간인을 반군협력자라는 혐의만으로 불법적으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는데,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계엄령의 일반적 한계를 벗어난 위법적인 행위였다.
계엄령 아래에서 이루어진 군의 ‘즉결처분권’은 민간인 살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근거였으나, 법의 일반적 요건이나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계엄포고문에서 즉결처분은 “군율”에 따르도록 규정하였으나, 민간인을 ‘즉결처분’, 곧 임의처형하는 과정에서 관련 법 조항을 따르지 않았다. 본 사건에서 군경당국은 법적 통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은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당했으며, 이는 ‘즉결처분’이 사실상 학살이었음을 말해준다.
13.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지원 조처를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본 사건의 진실규명내용을 관련 역사기록에 반영하고,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다.